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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8〉
1972년 ‘10월 유신’이 날벼락처럼 떨어졌다. 신병 치료차 일본에 머물던 나, 김대중(DJ)은 망명 투쟁을 선택했다.
이듬해 7월 미국에서 유신 반대 운동의 구심체로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발족했다. “망명정부를 세우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단번에 물리쳤다. 8월 15일에는 한민통 일본 본부를 구축할 예정이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나는 불편한 망명객이었다.
긴장감이 고조되던 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날 오후 1시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 22층 2212호실, 나는 일본을 방문한 양일동 의원과 식사를 마치고 방을 나서던 참이었다.
옆방 2210호실에서 괴한 네댓 명이 갑자기 뛰쳐나와 덮쳤다. 이어 2210호실로 끌고 간 뒤 마취 손수건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자동차에 실려 오사카의 한 가옥(한국 중앙정보부의 안가)에 끌려갔다. 납치범들은 나에게 허름한 옷과 신발로 갈아 입혔다. 다시 자동차에 태워 바닷가로 이동한 뒤 큰 배(중정 공작선 ‘용금호’)에서 나를 넘겼다.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판 밑에 감금당했다. 몸을 관(棺) 바닥에 까는 칠성판 같은 판자에 송장처럼 묶었다. 입에는 재갈을 물렸고, 두 눈은 붕대로 가렸다. 손과 발에는 돌덩이처럼 무거운 물체를 매달았다.
“솜이불을 덮어야 물속에서 안 떠오른다” “후까”(일본어로 ‘상어’라는 뜻)란 말을 괴한들은 쑥덕였다. “나를 바다에 던져 상어 밥으로 주려는 것”이라는 끔찍한 상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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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4620?cloc=dailymo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