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공무원 이대준 씨 부인 권영미 씨와는 2년 전 제가 언론사 최초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드님과 함께였는데요.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가 얼마나 많으실까요. 두 번째 인터뷰를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전화로 연결돼 있는데요. 나와 계시죠?
네 안녕하세요.
앵커)어제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셨기 때문에 2년 만에 실명으로 말씀을 나누게 됐습니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렇게 호소를 해 오셨는데요. 지난 2년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주변에서 알든 모르든 저희 가족들은 일단 국가에서 월북자 가족으로 이렇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스스로 위축되는 게 되게 많았거든요. 그래서 아이들과 저는 거의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가지 않고 집에서만 거의 지냈던 것 같습니다.
앵커) 저희가 아이들이 아빠한테 보낸 편지들이 몇 가지 자료들을 좀 제공을 받아서 영상으로 보내드리고 있는데요. 지금 아드님이 아빠한테 쓴 편지가 나가고 있습니다. 잠깐 읽어드리면 “천진난만하게 아빠 줄 거라고 편지를 쓰는 동생을 볼 때마다 아빠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될지... 시신조차 찾지 못해 찾아갈 곳이 없다는 현실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 아드님이 오빠로서 고민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따님이 저랑 인터뷰할 때는 한 일곱 살이었던 걸로 저는 기억을 합니다. 그때 아버지의 상황을 몰라서 저희가 인터뷰 시간 잡기도 참 애를 먹었었는데 지금 몇 살인가요?
지금 10살입니다.
앵커)10살이 됐군요. 혹시 아직도 아버지 일을 모르고 있을까요?
곧 이제 장례식도 해야 되는 부분도 있고요. 딸이 너무 아빠를 찾으니까 그때마다 제가 곧 올 거라는 말로 자꾸 희망 고문을 하는 것 같아서 최근에 제가 이제 아빠 사망 사실은 알렸습니다.
앵커)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 상황도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아직 어리기 때문에 아빠가 총살을 당했다, 이런 얘기는 할 수가 없고요. 그냥 배에서 아빠가 하는 일을 아니까 그 일을 하다가 빠졌는데 사망하신 것 같다. 찾지도 못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이제 나중에 하는 말이 제가 아빠 얘기를 하니까 딸은 아빠가 곧 온다고 얘기를 하는 줄 알았대요. 근데 사망했다는 얘기를 하니까,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면서 그때 엄청 많이 울었어요. 같이 부둥켜 안고.
앵커)아드님의 상황을 좀 말씀을 해주신다면요?
아들 같은 경우에는 많은 것을 잃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자기 꿈도 포기를 해야 했던 부분도 있었고 제일 컸던 것은 아무 세상에 대해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10대의 소년이었는데 정부에서 하는 말, 대통령이 하는 말은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였거든요. 그런 대통령님의 편지였기에 무조건 믿었던 거였죠. 그런데 그것이 이제 퇴임 전까지 지켜지지 않으면서 아이는 엄청난 배신감과 상처를 받은 거예요. 그래서 이번 정부에서도 대통령께서 약속을 해 주셨지만 혹시나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히 컸다고 하더라고요.
앵커)저희가 지금 카톡 메시지 내용 하나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남편 분한테 이제 받지 못하는 문자 보내신 건데. 참 마음이 아픕니다. 읽지도 않는 톡을 혼자 이렇게 보낸다. 홀로 계시고 언제 가장 힘들다고 느끼셨을까요?
늘 힘들었는데 딸이 아빠 찾을 때 힘들었고요. 카톡을 제가 1년 동안 계속 줄기차게 보냈는데 1년이 지나니까 카톡에 읽지 않으면 있어야 하는 ‘1’이 사라지더라고요. 저도 그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그거 알아보니까 카톡이 1년 동안 사용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탈퇴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앵커)저희가 좀 어려운 질문을 좀 드리겠습니다. 정부가 발표했던 월북설은 공식적으로 철회가 됐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단은 형님께서, 이래진 씨께서 서훈 전 안보실장 또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고발할 계획이 있다고 밝히셨고요. 전 정권에서 누군가의 지시로 월북 프레임을 짰다고 유족들이 주장을 하셨거든요. 청와대에 책임이 있다고 이렇게 보고 계시는 건가요?
저는 어저께 해경에서 직원을 상대로 조사했던 진술서를 어제 처음 보았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서 지금 민주당에서도 월북이 아닌 증거가 없다고 말을 하는데, 그게 월북이 아닌 증거잖아요. 가장 옆에서 지켜봤던 직원, 동고동락을 했던 직원들이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 기사에 대한 것들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고 그 기사를 오히려 숨겼단 말이죠. 해경이 자체적으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더 큰 사람 더 높은 분들이 관여하지 않고는 해경 스스로 그런 기사들을, 조사들을 하나도 공개하지 않고 가족에게조차도 알려주지 않고 숨긴 채로 외부로 단정 지었다는 것 자체가 해경 자체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앵커)지금 권영미 씨께서 말씀하셨지만 동료들이 월북 주장은 말이 안 된다고 진술을 했는데 감춰졌다. 그리고 저희도 사실 굉장히 인터뷰하기가 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혹시 이런 내용을 뒤에라도 동료들에게 직접 들으신 것도 있습니까?
일단 직원들, 서해 관리단 직원분이 꾸준하게 연락을 주시고 계셨거든요. 지금까지도 많이 위로를 계속해 주시고 지금 가족들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 해 주시고 계신데 그러는 과정에서 직원들 중에서 ‘월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앵커)아까 언급을 좀 하셨는데요. 민주당에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이제 “월북 의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가 뭐가 중요하냐” 이런 발언이 나왔습니다. 혹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까요?
월북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한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당시에 왜 그렇게 월북 주장을 했는지, 왜 사람을 살리지 못해 놓고는 월북이라는 그 단어로 모든 것을 포장하면서 월북으로만 몰고 갔었는지, 저는 묻고 싶고요. 저는 솔직히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지금 어제 오늘 계속해서 기사로 제가 읽고 있거든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게 월북이라고 주장을 하고 싶으시면 가족들이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겁니다. 확실한 증거를. 그러면 저희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증거는 보여주지 않고 월북이라고 주장을 하시면 저희한테 2차 가해하시는 거거든요. 다시는 그 입에 월북이란 단어를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앵커)저희도 인터뷰 준비하다 좀 놀랐는데 아직도 고인 장례를 치르지 못하셨더라고요. 지금 사진이 나가고 있는데 이제 옷가지랑 모아서 좀 태워서 보내드린 걸까요?
일단 월북자라는 누명을 쓰고는 장례를 하고 싶지는 않았고요. 저희 대한민국에서는 사람이 사망하면 입었던 옷가지 태워 보내는 그런 관례가 있기 때문에 제가 남편이랑 자주 다니던 절에 부탁을 해서 그동안 잘 입었던 옷, 거기 목도리는 제가 손수 따로 또 짰던 건데 남편의 경우 잘하고 다녔거든요. 그거랑. 또 노잣돈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주머니에 제가 돈도 이렇게 좀 넣어서. 공무원이 업무 중 사망을 했기 때문에 완벽한 명예회복이 되려면 순직으로 인정을 받는 거고요. 그렇게 되면 장례를 제대로 치르고 싶습니다.
앵커) 2년 만에 월북 공무원이 아니라 공무원 이대준 씨로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저희가 부인 권영미 씨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권영미 故이대준 씨 부인